무당이 모시는 신들: 한국 무속신앙의 역사적 고찰
한국 무속신앙은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뿌리 깊은 종교적 전통으로 자리매김해왔다. 이러한 무속신앙의 중심에는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무당이 존재하며, 무당들이 모시는 다양한 신들은 한국인의 종교적 사고와 민족 문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오늘날까지도 무속은 우리 사회의 기층문화로서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으며, 무당들이 모시는 신들에 대한 역사적 사료와 연구는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무당과 신의 관계: 역사적 고찰
무당은 고조선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청동기시대 유물에서 발견되는 청동 방울이나 청동 거울 등 무속 제의용 도구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신단수(神壇樹)는 오늘날 굿을 할 때 세우는 신간이나 솟대, 당산나무의 원형적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라 할 수 있다. 이는 무속이 고조선시대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무당의 어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한자어로 '무당이 굿을 하는 장소'라는 뜻의 무당(巫堂)에서 유래했다는 관점과, 북아시아, 중앙아시아 여러 종족이 사용하는 샤만을 지칭하는 'Udagan' 계통의 순 우리말이 한자화되었다는 고유어설이 있다. 어떤 어원이 정확하든, 무당의 존재는 한국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 전통의 담당자였음이 분명하다.
무당이 모시는 신들의 체계와 유형
무당이 모시는 신은 크게 '몸주신'과 일반적인 '모시는 신'으로 구분할 수 있다. 몸주신은 무당이 신병을 앓을 때 강신하여 영력의 주체가 되는 무속신격으로, 무당의 수호신이자 신통력의 원천이 된다. 모든 신이 몸주가 되는 것은 아니며, 보통 하나 또는 둘의 특별한 신이 몸주로 선택된다.
역사적 사료에 따르면, 몸주신의 종류는 산신, 최영장군, 일광보살, 월광보살, 칠성신, 명도, 작도대신, 신장(神將), 신장할멈 등으로 다양하다. 특히 1930년대에는 최영 장군, 임경업 장군 등 억울하게 죽은 장수의 넋이 무당의 보호신인 몸주로 많이 모셔졌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당이 모시는 신들은 그 출신에 따라 천신, 자연신, 인간출신 신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옥황상제, 삼불제석, 칠성신 등의 천신, 산신령, 용왕 등의 자연신, 그리고 최영장군, 임경업장군 등의 인간출신 신들이 있다. 또한 관음보살, 약사여래처럼 불교에서 온 무속 신들도 있어 무속신앙의 혼합적 특성을 보여준다.
몸주신의 특성과 의미
몸주신은 무당의 핵심적인 영적 정체성을 형성한다. 몸주는 무병(巫病)을 앓는 과정이나 내림굿(降神祭)에서 결정되는데, 꿈이나 환상 속에 나타난 신령의 상(像)을 몸주로 모시거나, 무구(巫具)인 거울·방울 등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몸주신의 신체(神體)로 삼기도 한다. 또한 내림굿을 할 때 망아경(忘我境)에서 소리치면서 불러낸 이름이 그 사람의 몸주가 되기도 한다.
몸주와 무당의 관계는 무당 속에 잠재된 내면적 인격과 의식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상징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몸주는 무당의 영적 능력의 원천이자, 무당이 굿을 할 때나 점을 칠 때 강신하여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주체가 된다.
몸주신을 누구로 모시는가에 따라 무당의 명칭과 역할이 특징화되는 경우가 있다. 관우를 몸주로 모시는 전내(殿內), 어린 아이의 혼령을 모시는 태주, 명두 등이 그 예이다. 역사적 사료를 보면 20세기 초까지도 서울에는 관성제군(關聖帝君, 關羽)을 모신 전내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한말에는 국가와 민간에서 무력(武力)이 강한 관왕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시기라, 국가 차원에서 관왕묘에 제사를 지내고 고종 황제가 직접 관왕묘에 행차하기도 했다.
무당이 모시는 신들의 신격 체계
무당이 모시는 신들은 계급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 서울 지역의 무속신앙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신들은 크게 세 계급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제석계급의 신령으로, 불교 계통의 신들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전내계급의 신령으로, 주로 중국에서 유래된 신령들이며, 관우를 중심으로 한 중국 도교계통의 신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는 박수, 만신 계급의 신령으로, 한국의 토착신들이 이 계급에 속한다.
제석계급의 신령으로는 삼불제석(옥황상제, 석가여래, 미륵불), 칠성신, 일월성신 등이 있다. 이들은 원신(原神)이라고도 불리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신격으로 여겨진다. 이들 원신이 몸주로 오는 무당은 전국에 10명도 되지 않을 정도로 드물다고 한다.
전내계급의 신령에는 관성제군(관우), 소열황제(유비), 장장군(장비), 와룡선생(제갈량), 옥천대사, 오호대장, 오방신장 등이 있다. 이들은 주로 완과태평(完課太平)을 보증해 주는 신으로 여겨진다.
박수, 만신 계급의 신령은 한국의 토착신들로, 조상신의 성격을 가진다. 대표적으로 최영장군, 별상(연산군, 광해군, 사도세자 등 비극적 죽음을 맞은 왕족), 군웅(신격화된 전쟁영웅), 창부씨(예능신) 등이 있다. 이들 토착신들은 나라의 복과 평안을 주관한다고 믿어진다.
무신도(巫神圖)에 나타난 신들
무신도는 무속신앙에서 섬기는 신들을 그린 종교화로, 무당들이 신단(神壇)에 모시는 신들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무신도의 역사적 전거(典據)는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 노무편(老巫篇)에서 찾을 수 있다. "벽에는 울긋불긋 신상을 그려놓고, 칠원과 구요는 액자에 그려 붙였다"라는 구절은 원색으로 그려진 무신도의 존재를 알려준다.
현재 남아 있는 무신도는 무신의 계통으로 20여종이고, 모두 113종이 보고되어 있다. 무신의 계통으로 보면, 천신, 일신, 월신, 성신, 지신, 산신, 수신, 화신, 장군신, 명부신, 동물신, 왕신, 대감신, 불교신, 용신, 방위신, 사귀, 역신, 산신, 신장신, 무조신 등의 무신도가 있다.
무신도의 분포는 무속의 지역적 구조와 관계된다. 무신도는 중부와 북부지방에 두루 보이는데, 이는 이 지역의 무당이 주로 강신무이기 때문이다. 강신무는 몸주신을 신단에 모시기 때문에 무신을 상징하는 무신도가 필요하지만, 남부지방의 세습무는 그럴 필요가 없어 무신도가 적게 나타난다.
무속신앙의 역사적 변천과 신들의 위상 변화
고대 한국사회에서 무당은 매우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 선사시대는 제정일치 사회로,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분리되지 않았다. 단군왕검의 '검'이 신령을 뜻하는 '캄'(kam)에서 유래했다는 설은 고대 지도자가 무군(巫君)의 성격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삼국시대 초기까지도 무당의 지위는 상당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제2대 왕 남해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존경받는 무당'이란 뜻이라고 한다. 또한 남해왕 3년에 박혁거세의 묘 제사를 왕의 누이 아로(阿老)가 주관했다는 기록은 여성 무당의 존재와 그 위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불교 유입과 국가 체제 정비, 그리고 고려시대 이후 유교 이념의 확산으로 무당의 정치적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무당의 궁중 출입 금지, 도성 밖으로의 축출, 무당이 담당하던 국행 의례를 중지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무속은 민간 신앙으로서 지속적인 생명력을 유지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모시는 신들의 위상과 체계도 변화해왔다.
무당 유형에 따른 모시는 신들의 차이
한국의 무당은 크게 강신무와 세습무로 나뉘는데, 이들이 모시는 신의 성격과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강신무는 신내림을 통해 개인적으로 신을 모시는 무당으로, 자신의 몸에 신이 내려 그 신을 모신다. 반면 세습무는 집안-가문(혹은 마을)에 내려진 신을 대를 이어가며 모시는 형태다.
강신무는 주로 중북부 지역에 분포하며, 몸주신을 모시고 그에 대한 무신도를 신단에 모신다. 강신무는 자신의 몸이 신체(神體)이기 때문에 몸만 있으면 신령을 모실 수 있어, 개인적으로 신당을 차리고 점이나 굿을 통해 영업하는 특성이 있다.
세습무는 주로 남부지역에 분포하며, 신내림 없이도 마을의 무속 의례를 대대로 배우고 물려받는 형태다. 세습무는 마을 단위의 성소를 모시는 무당으로, 마을 공동체의 수호신을 모시고 마을 축제를 주관하는 역할을 했다.
시대에 따라 모시는 신의 변화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과정에서 세습무 전통이 상당 부분 파괴되어, 강신무들이 지역 축제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최근에는 강신무들의 비즈니스적 특성이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면서 더욱 우세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변화는 무당이 모시는 신들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무속 의례와 신들
『조선왕조실록』에는 무속 의례가 세 가지로 분류되어 나타난다. 첫째는 기복제(祈福祭)로, 현세의 복을 비는 의례다. 둘째는 구병제(救病祭)로, 병자를 치유하는 의례다. 셋째는 사령제(死靈祭)로, 죽은 이를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의례다. 이러한 의례들은 각각 다른 신들을 모시고 진행되었다.
조선 왕조는 표면적으로는 유교 이념을 중시했지만, 실제로는 왕실을 중심으로 무속 의례가 지속되었다. 특히 가뭄이나 전염병과 같은 국가적 재난 시에는 무당들을 동원한 국행 의례가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신들이 모셔졌다. 왕실의 안녕을 위해 모셔진 신들과 일반 민간에서 모셔진 신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 무속에서 모시는 신들의 의미와 가치
현대 한국 사회에서 무속은 여전히 민간 신앙으로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무당이 모시는 신들은 한국인의 정신세계와 문화적 정체성을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다. 이들 신은 단순한 미신적 대상이 아니라, 한국인의 고유한 종교 체험과, 현세적 축복, 그리고 영적 위안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다.
무당이 모시는 신들은 자연신앙, 조상숭배, 그리고 외래종교와의 습합 등 한국 종교문화의 복합적 특성을 보여준다. 산신, 용왕 등의 자연신, 최영장군 같은 역사적 인물의 신격화, 그리고 불교, 도교 신앙과의 융합 등은 한국 무속신앙의 포용성과 적응력을 보여준다.
현대사회에서도 무당들은 여전히 굿과 점을 통해 신들과 소통하며, 사람들의 소원을 대신 전하고 신의 뜻을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무속 신앙은 한국인의 정신적 뿌리이자, 현대 사회의 불안과 고통 속에서도 위안과 희망을 주는 문화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결론: 무당이 모시는 신들의 역사적 의의
무당이 모시는 신들은 한국 무속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존재들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종교적 삶과 문화적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역사적 사료들은 무당과 그들이 모시는 신들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왔음을 보여준다.
무당이 모시는 신들은 단순한 미신적 대상이 아니라, 한국인의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종교적 열망이 투영된 문화적 산물이다. 이들 신은 천신, 자연신, 인간출신 신 등 다양한 층위를 가지며, 불교, 도교 등 외래 종교와의 습합을 통해 한국적 특성을 형성해왔다.
현대 사회에서도 무당이 모시는 신들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적 위안과 삶의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 무속신앙의 핵심인 이들 신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이해는 한국인의 정신세계와 문화적 뿌리를 탐구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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